K-민화 이성준 기자 | 우리는 묻지 않는다. 이것이 글씨인가, 그림인가를. 우리는 선언한다. 이것은 문화다. 1. K는 국기(國旗)다. K는 알파벳의 한 글자가 아니다. K는 한국이라는 시간의 축적이며, 역사·정신·손의 기억이 응축된 상징이다. K는 더 이상 수식어가 아니다. K는 중심이며, 출발점이며, 세계와 마주하는 한국의 얼굴이다. 우리는 K를 앞에 둔다. 그것은 자부심이 아니라 책임이기 때문이다. Graphy는 언어다. Graphy는 쓰는 행위가 아니다. Graphy는 사유가 선으로 드러나는 방식이다. 문자 이전의 선, 말보다 먼저 태어난 형상, 인간이 생각을 남겨온 가장 오래된 언어, 그리고 Graphy는 기록이 아니라 표현이며, 정보가 아니라 존재의 흔적이다. K-Graphy는 문화 선언이다. K-Graphy는 장르가 아니다. K-Graphy는 기법이 아니다. K-Graphy는 스타일이 아니다. K-Graphy는 한국적 사유와 손의 언어가 결합된 문화 선언이다. 우리는 글과 그림을 나누지 않는다. 우리는 경계를 묻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이 선에 정신이 있는가. 이 획에 시대가 담겨 있는가. K-그라피는 모두를 포괄한다. 대나무 붓으로 쓰는 죽
K-민화 이성준 기자 | 송학도는 오래된 약속의 그림이다. 소나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알고, 학은 시간을 건너는 법을 안다. 백찬희 작가의 '송학도'는 이 두 존재를 나란히 세워, 장수의 기원을 넘어 함께 사는 태도를 묻는다. 작품 속 소나무는 요란하지 않다. 굵은 줄기와 촘촘한 솔잎은 바람을 과시하지 않고, 학은 날갯짓을 멈춘 채 가지 위에 서 있다. 이 정적은 멈춤이 아니라 지속이다. 민화가 말해온 이상은 언제나 여기 있었다. 크게 외치지 않고, 오래 남는 것. 견딤과 건넘의 균형 백찬희 작가의 '송학도'에서 소나무는 배경이 아니다. 학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자리이며, 계절의 흔적을 감내하는 몸이다. 학은 그 위에 앉아 있다가, 필요할 때 날아오를 줄 안다. 서로의 역할은 분명하지만 위계는 없다. 견디는 자와 건너는 자가 균형을 이룬다. 이 그림의 장수는 숫자가 아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오래 같이 사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송학도는 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장면은 축복의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합의처럼 읽힌다. 절제된 색, 깊어진 호흡 채색은 낮고 단정하다. 청록과 백색, 갈색의 조율은 눈에 띄기보다 눈을 쉬게 한다. 깃털의 결, 솔잎의 밀도는
K-민화 이성준 기자 | K-민화에서 말은 언제나 속도의 상징이었다. 출세, 합격, 입신양명. 말은 인간의 욕망을 태우고 가장 빠르게 달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지연 작가의 '복마福馬'는 다르다. 이 말은 달리지 않는다. 대신 단단히 ‘서’ 있다. 작품 중앙의 백마는 힘찬 질주 대신 균형 잡힌 자세로 자리한다. 말의 등 위에는 책과 문방구, 붓과 종이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복이란 우연히 굴러오는 행운이 아니라, 공부와 준비, 일상의 축적 위에 놓이는 것임을 말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복福’의 배치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복은 외부에서 날아오지 않는다. 말의 몸, 책의 무게, 도구의 질서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 복은 목표가 아니라 상태이며,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이것이 이지연의 복마가 전통 민화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책거리와 말의 결합, 생활 민화의 진화의 복마는 책거리의 상징 체계를 차용하면서도 이를 한 단계 확장한다. 책은 지식이고, 붓은 실천이며, 말은 이동이다. 이 세 요소가 한 화면에 공존할 때, 민화는 더 이상 과거의 길상도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의 생활 철학이 된다. 말 아래에 배치된 꽃문 장식과 둥근 기물
K-민화 이성준 기자 | 호랑이는 언제나 강하다. 그러나 박현정 작가의 '송죽설호'가 보여주는 강함은 포효의 크기가 아니라 버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눈발이 흩날리는 설경 속, 송죽 사이를 가르며 내려오는 이 설호雪虎는 위협보다 결기를 먼저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겨울은 배경이 아니다. 겨울은 시험이며, 설호는 그 시험을 통과하는 존재다. 눈은 온 화면을 덮되 시야를 가리지 않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 박현정 작가는 이 자연의 질서를 통해 호랑이의 성정性情을 규정한다. 강함은 돌진이 아니라 지속이며, 용기는 소란이 아니라 침착이라는 선언이다. 호랑이의 발걸음은 낮고 무겁다. 한 발 한 발이 산의 결을 읽듯 이어진다. 이는 민화의 전통적 호랑이가 가진 해학이나 과장의 영역을 넘어, 현실의 무게를 감내하는 존재로서의 호랑이다. 눈을 밟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묘사는 단순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화면에 심어 넣은 결과다. 색채의 선택 또한 절제되어 있다. 설경의 백색은 과도하게 번지지 않고, 호피의 선은 또렷하되 과장되지 않는다. 송죽의 녹은 차갑게 살아 있고, 바위의 회색은 계절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한다. 이는 기술의 과시가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그림 앞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게 된다. 노지영 작가의 '화조도'는 한 계절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생명이 머무는 방식을 조용히 들려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매화 가지와 꽃, 그리고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새들은 ‘움직임’보다 ‘공존’을 먼저 말한다. 화조도는 민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르다. 왕도, 신선도, 호랑이도 아닌 꽃과 새. 일상의 풍경이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언어다. 그러나 노지영의 화조도는 단순한 길상吉祥의 나열이 아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하나의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를 기준으로 수많은 생명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며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나무의 줄기는 굽이치되 흔들리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처럼 패인 옹이와 뒤틀린 가지는 생의 굴곡을 닮았고, 그 위에 핀 매화는 시련 이후에 오는 단단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꽃은 만개했지만 과시하지 않고, 새들은 날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모두가 자기 몫의 봄을 살고 있을 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새들의 배치다. 까치, 제비, 원앙, 이름 모를 작은 새들까지 이들은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 어떤 새는 날고, 어떤 새는 쉬며, 어떤 새는 서로를 바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그림 앞에 서면 먼저 고요한 질서가 다가온다. 요란한 기교도, 감정을 앞세운 서사도 없다. 대신 화면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오래된 약속처럼 견고한 균형이다. 조경선 작가의 '일월오봉도'는 ‘왕의 병풍’이라는 익숙한 틀을 빌려, 그보다 훨씬 근원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누가 중심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중심인가라는 질문이다. 일월오봉도는 본래 권력의 상징이었다. 해와 달, 다섯 봉우리, 소나무와 물이 질서는 왕을 우주의 중심에 놓기 위한 시각적 장치였다. 그러나 조경선의 화면에서 왕은 사라진다. 대신 남는 것은 질서 그 자체다. 위와 아래가 뒤집히고, 현실과 반영이 맞물리며, 하늘과 땅은 서로를 비춘다. 중심은 비어 있고, 그 자리에 우주의 리듬이 놓인다. 특히 수면水面을 가로지르는 반복의 파동은 인상적이다. 겹겹이 쌓인 물결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처럼 읽힌다. 흐르되 무너지지 않고, 반복되되 지루하지 않다. 이는 민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과 질서를 통한 안정을 현대적으로 번역한 결과다. 자연은 요동치지만, 그 요동 안에는 언제나 법칙이 있다. 색의 선택 또한 치밀하다. 짙은 남색의 하늘, 절제된 황토와 녹청, 그리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혜원 작가의 '수복 백물도'는 화면을 가득 채운 수많은 기물과 상징을 통해, 우리가 잊고 살아온 ‘복의 본질’을 다시 묻는다. 이 그림은 부귀를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직하게 펼쳐 보인다. 백물도는 말 그대로 수많은 물건이 등장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이 물건들은 시장의 진열품이 아니다. 책과 문방구는 배움의 시간을, 악기와 도구는 익힘의 세월을, 그릇과 생활 기물은 살아낸 하루하루를 상징한다. 이혜원 작가의 백물도는 물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흔적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특히 ‘수복壽福’이라는 두 글자가 화면 전체를 감싸듯 배치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장수와 복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래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복만 많아도 균형을 잃는다. 이 작품은 민화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진리를 다시 꺼내 놓는다. 복은 오래 쌓여야 깊어지고, 장수는 바르게 살아야 의미를 얻는다는 사실이다. 구조적으로 보아도 이 작품은 흥미롭다. 단단한 탁자 위에 올려진 백물은 무너지지 않는다.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위에는 정신의 상징이, 아래에는 생활의 토대가 놓인다. 이는 우연이 아니라 민화적 세계관의 정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그림에는 호랑이가 없다. 그러나 누구도 이 작품 앞에서 호랑이의 부재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면을 가득 채운 것은, 호랑이보다 더 호랑이 같은 기운이다. 이경아의 '호피도'는 형상을 지운 자리에서 본질만을 남긴 k-민화다. 호피虎皮는 단순한 무늬가 아니다. 조선의 민화에서 호피는 권위와 벽사僻邪, 그리고 두려움을 넘어서는 생존의 상징이었다. 왕의 좌정 아래 깔리던 호피, 장수의 용맹을 대신하던 호피는 ‘사냥된 짐승의 껍질’이 아니라, 제어된 힘의 표식이었다. 이경아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호랑이의 눈, 이빨, 발톱을 모두 지우고도, 힘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작품 중앙을 따라 흐르는 대칭의 축은 인상적이다. 무작위처럼 보이는 점과 얼룩들은 실은 치밀한 리듬을 이루며, 중심을 기준으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이는 자연의 무늬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라, 자연이 가진 질서를 해석한 결과다. 야성은 혼돈이 아니라, 스스로의 법칙을 지닌 상태임을 이 작품은 말한다. 색감 또한 절묘하다. 황토에 가까운 바탕 위에 얹힌 검갈색의 무늬는 과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된 시간의 결을 닮았다. 이는 ‘날카로운 포효’가 아니라, 침
K-민화 이성준 기자 | k-민화에서 정원은 늘 말이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삶의 원칙이 숨 쉬고 있었다. 김건하 작가의 ‘화정도’는 그 오래된 침묵을 다시 불러낸다. 이 그림 속 정원에는 위계가 없다. 당근과 가지가 꽃보다 낮지 않고, 국화와 작약이 채소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나비와 곤충은 장식처럼 머무르지 않고, 순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는 질서가 없는 세계가 아니라, 서열이 필요 없는 세계다. 민화는 원래 삶의 그림이었다. 김건하는 그 사실을 과장하지 않는다. 상서도, 길상도라는 이름으로 덧칠된 해석을 걷어내고, 생활의 본래 자리로 그림을 되돌린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눈을 압도하는 화려함 대신, 마음을 붙드는 균형이 있다. 당근은 땅속에서 자라난다.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뿌리를 키운 뒤에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가지는 소리 없이 열매를 맺고, 꽃은 피되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김건하 작가의 화정도는 이 평범한 존재들의 태도를 통해 말한다. 삶의 중심은 늘 조용한 곳에 있다고. 그 위를 오가는 나비와 곤충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그러나 그 짧은 체류가 있어 정원은 살아 움직인다. 먹고사는 문제와 아름다움은 이
K-민화 이성준 기자 | 그러나 그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오래 축적된 시간의 언어다. 이진경 작가의 ‘백학도’에서 학은 날거나 머물며, 혹은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한다. 이 장면에는 과장된 상징도, 설명을 요구하는 장치도 없다. 대신 화면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기다림의 품격이다. 소나무는 굽이치며 서 있다. 바람과 세월을 견뎌온 몸의 기록이다. 그 곁을 흐르는 물과 바다는 쉼 없이 반복되는 삶의 리듬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위로 흰 학들이 날아오른다. 이 비행은 도약이 아니라 순환이다. 떠남과 귀환, 시작과 마무리가 하나의 호흡으로 이어진다. 백학은 장수를 뜻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학은 단순한 길상의 상징을 넘어선다. 학은 서두르지 않는다. 무리를 지어도 앞서려 하지 않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다. 이는 오늘의 사회가 잊고 지낸 태도에 대한 조용한 제안이다. 빠름이 능력이 되고, 과시가 성취로 오해되는 시대에, 이진경의 학은 속도의 윤리를 묻는다. 색은 절제되어 있고, 선은 단정하다. 파도의 반복과 산의 굴곡, 구름의 흐름은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전체를 이룬다. 이것이 민화가 오래도록 지켜온 세계관이다. 경쟁이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