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화 이성준 기자 | 행렬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식이며, 공동체가 공유한 질서의 시각적 선언이다. 이미형 교수의 ‘행렬도’는 이 오래된 개념을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리며, ‘질서의 미학’이 어떻게 예술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과 기물, 깃발과 악대, 의장대의 반복적 배열은 혼잡이 아니라 리듬을 만든다. 수백의 형상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 하나도 무질서하지 않다. 각각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전체는 하나의 방향으로 흐른다. 이 작품에서 행렬은 권력의 과시가 아니라 공동체의 호흡이다. 전통 행렬도의 본질은 기록성과 상징성의 결합에 있다. 역사적 사건을 남기면서도, 그 사건이 지닌 위계·예법·미감을 동시에 담아낸다. 이미형 교수는 이 전통적 형식을 충실히 따르되, 색과 간결한 필치, 과감한 화면 분할을 통해 현대적 시선을 더한다. 덕분에 작품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관람자에게 말을 건다. 특히 주목할 점은 ‘거리감’의 처리다. 개별 인물은 소략하게 그려졌지만, 군집은 오히려 또렷하다. 이는 개인보다 질서와 관계가 중심이 되는 행렬도의 미학을 정확히 이해한 결과다. 가까이서 보면 작은
K-민화 이성준 기자 | 우현진 작가의 작품은 전통 민화의 상징 체계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 안에 오늘의 호흡을 불어넣는다. 화면을 채운 모란은 단순한 부귀의 상징을 넘어, 시간 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삶의 기품을 말한다. 붉은 모란과 백모란이 나란히 서 있는 구도는 대비가 아닌 공존을 택한다. 강렬함과 온유함, 열정과 평정이 한 화면 안에서 자연스럽게 숨을 고른다. 작품 하단을 받치고 있는 괴석은 이 그림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푸른 기운을 머금은 기암은 흔들리지 않는 근간을 상징하며, 그 위로 자라나는 모란과 들꽃들은 삶의 지속과 회복을 은유한다. 이는 민화가 지녀온 길상吉祥의 의미를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한 지점이다. 화려함은 뿌리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작가는 조용히 화면으로 증명한다. 나비의 등장은 이 작품에 생동을 더한다. 정지된 병풍의 화면 속에서도 나비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계절의 흐름과 생명의 순환을 암시한다. 전통 민화가 지녔던 ‘기원의 그림’이라는 본질은 그대로 유지하되, 그 기원의 대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일상으로 확장된다. 우현진의 모란 병풍은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다독이는 그림이다. 이 작품 앞에 서
K-민화 이성준 기자 | 본 작품은 전통 민화에 담긴 길상과 염원의 의미를 오늘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현대 길상화입니다. 민화가 지닌 본래의 역할은 특정한 계층이나 시기를 위한 그림이 아니라,누구나 일상 속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위로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삶의 그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전통 속에 담긴 다양한 염원과 길상의 상징을 바탕으로,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감정과 이야기를 화폭에 담고자 했다. 말과 책거리, 도구들..성취와 배움, 삶의 축적과 이어짐을 의미하며, 원형의 구조는 소망이 순환하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특정한 의미를 강요하기보다, 작품을 마주하는 각자가 자신의 바람과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열린 길상화이기를 지향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시선을 머물렀을 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작은 위로나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전통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호흡할 때 살아난다고 믿습니다. 본 작품이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자리이자 새해의 좋은 기운과 소망을 전하는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작가노트 | 이지연 저는 전통을 재해석하여 현대민화로 길상
K-민화 이성준 기자 | 정원숙 작가의 모란도는 전통 민화가 지닌 길상의 의미를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피워 올린 K-민화의 모범적 사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모란은 부귀와 영화, 번영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 그 의미는 단순한 기원의 차원을 넘어 따뜻한 덕담처럼 다가온다. 붉은 모란과 흰 모란이 어우러진 화면은 대비보다 조화를 택한다. 강렬함과 순정함, 열정과 평안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폭 안에서 공존한다. 이는 새해를 맞이하는 세화의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한 해의 시작에서 모든 이에게 골고루 복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색과 리듬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화면 하단의 괴석 표현이다. 단단하고 묵직한 바위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반을 상징하며, 그 위로 뻗어 오르는 모란의 줄기들은 생명력과 확장의 에너지를 전한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뿌리 깊은 삶 위에 피어나는 번영이라는 민화적 은유다. 정원숙의 모란은 과시하지 않는다. 색은 풍부하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구도는 치밀하지만 답답하지 않다. 이는 전통 기법 위에 쌓아 올린 숙련의 결과이며, 동시에 현대 민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제시한
K-민화 이성준 기자 | 소정희 작가의 작품 “세상만사 잊고 살게나” 속 호랑이는 위엄보다 여유가 먼저 보인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대는 산군山君이 아니라, 세상의 무게를 한 발짝 내려놓은 존재다. 민화 속 호랑이가 원래 지녔던 풍자와 해학의 전통은 이 작품에서 현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쉼의 상징’으로 되살아난다. 화면 속 호랑이는 몸을 틀어 앉은 채 한쪽 앞발을 내밀고 있다. 공격도, 경계도 아닌 제스처다. 마치 “그만 좀 애써도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굽이진 꼬리는 긴장을 풀어낸 호흡처럼 둥글고, 표정에는 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다. 힘의 과시가 아니라 힘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경지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배경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생각이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이다. 소정희 작가는 전통 민화의 호랑이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오늘의 삶에 맞게 재해석한다. 바쁘고, 지치고,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시대 속에서 이 호랑이는 말한다. “세상만사, 잠시 잊고 살아도 괜찮다.” 이 작품의 미덕은 웃음이다. 가볍지만 얕지 않고, 익살스럽지만 가볍지 않다. 민화가 본래 수행했던 역할과 권력에 대한 풍자, 삶에 대한 위로, 웃음 속의 진실
K-민화 이성준 기자 | 김아랑 작가의 "어느 날"은 사건이 없는 하루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화면 위에는 화려한 상징들이 있지만, 그 어떤 것도 과시하지 않는다. 책거리 형식 위에 놓인 동백꽃과 복숭아, 실타래와 고양이는 전통 민화의 길상적 요소를 빌려오되, 해석은 매우 사적이고 현대적이다. 특히 화면 아래에서 실타래를 잡아당기는 고양이의 모습은 이 작품의 정서를 결정짓는 중요한 장치다. 고양이는 장난스럽고 자유롭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만 충실한 존재다. 그 위에 놓인 책과 기물들은 지식과 질서, 삶의 구조를 상징하지만, 고양이의 실타래 한 가닥에 의해 그 긴장감은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 작품에서 ‘나’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대신한다. 즐거운 존재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시선, 간섭하지 않고 지켜보는 태도는 오늘날 점점 사라져가는 감정의 방식이다. 김아랑의 민화는 설명보다 여백으로 말하고, 교훈보다 공기로 전해진다. 〈어느 날〉은 묻는다. 행복은 정말 거창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후 하나면 충분한가. 그래서 이 작품은 복을 말하면서도 소란스럽지 않고, 길상을 담고 있으면서
K-민화 이성준 기자 | 청연淸然 강경희의 작품 세계는 ‘보여주는 회화’ 이전에 ‘머무르게 하는 회화’다. 그의 캘리그라피는 글자를 쓰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씻는 수행의 흔적에 가깝다. 번짐과 여백, 멈춤과 흐름이 동시에 존재하는 먹의 호흡 속에서 문장은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관람자의 마음을 고요로 이끈다. 특히 화면을 가르는 먹의 농담과 파편처럼 흩어진 여백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사유의 속도를 되돌려 놓는다. 강경희의 캘리는 ‘강하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깊이 말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이는 선禪의 언어이자, 동양 회화의 본령이다. 함께 제시된 K-민화 책거리 작품은 전통 민화의 길상적 상징을 오늘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책과 문방구, 붓과 화병, 그리고 화면 전면에 놓인 수박은 단순한 정물이 아니다. 수박은 풍요와 생명, 책은 지혜와 축적, 붓은 창조와 실천을 상징하며, 이 모든 요소는 ‘삶을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강경희의 민화는 화려함보다 단정함, 과시보다 정갈한 질서를 택한다. 색은 말하고, 형태는 절제하며, 상징은 조용히 숨 쉰다. 이것이 바로 K-민화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방식임을 그의 작
K-민화 이성준 기자 | 김선예 작가의 탄탄대로 얼쑤!는 이름 그대로 새해의 희망과 축복이 한 폭에 터져 나오는 세화歲畵이다. 화면 가득 펼쳐진 붉은색·분홍색의 북청사자놀음은 전통의 흥겨움 속에서 우리 민족의 기운氣運과 염원念願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두 마리 사자는 해학과 생명력을 품은 표정으로 화면을 주도하며, 사자춤을 추는 인물들과 관람객의 시선을 자연스레 축제의 중심으로 끌어당긴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은 작가가 제목에 담은 대로 ‘탄탄대로坦坦大路’의 앞날이 평탄하기를 기원하는 길이다. 작품 속 인물 하나하나가 지닌 자세와 표정, 휘날리는 천과 흩날리는 꽃잎은 설날의 들뜬 마음, 잘되기를 바라는 기원, 그리고 모든 날이 축제가 되길 바라는 소망을 색채와 움직임으로 펼쳐낸다. 화면 위로 날아오르는 나비와 아이는 풍요와 재복을 상징하며, 사자의 등 위에서 환히 웃는 아이는 “새해에는 웃음이 절로 피어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한다. 또한 전통 민화 특유의 평면적 구도 안에서 작가는 섬세한 필치와 현대적 감각을 더해, 옛 형식이 단순한 복고가 아닌 살아 있는 K-민화의 현재성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사자의 털 표현은 색채의 농담과 결의
K-민화 이성준 기자 | 2026년은 병오년丙午年, 붉은 말의 해다. 불火의 기운을 지닌 오午가 병丙을 만나 뜨겁게 타오르며, 도약·생명력·행운을 상징하는 말의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해지는 해이다. 이 강렬한 기운을 K-민화의 조형언어로 풀어낸 작품이 바로 이 ‘福자 안의 붉은 말’이다. 처음 작품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은 모란꽃이 가득 메운 福복字의 형상이다. 모란은 부귀와 영화, 복과 번성의 상징으로 오래 사랑받아온 민화의 대표 길상吉祥이다. 그 화려한 꽃잎 사이로 고개를 내민 붉은 말은 단순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2026년 한 해의 운세와 기운을 상징하는 핵심 모티프다. 말은 예로부터 기상氣像이 밝고, 속도와 성장, 출세를 뜻해 선비들의 사랑을 받아온 중요한 길상 동물이다. 특히 병오년의 ‘붉은 말’은 강한 생명력과 추진력, 묵은 것을 태우고 새 길을 여는 변혁의 에너지를 품는다. 작가가 굳이 福자의 내부, 즉 ‘복이 깃드는 자리’에 말을 배치한 이유는 분명하다. “2026년의 복은 움직임 속에서 피어난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작품 속 붉은 말은 어딘가 유머와 생동을 품고 있다. 고개를 조심스레 내밀며 세
K-민화 이성준 기자 | 홍명 작가는 말한다. “2026년 병오년 새해, 진흙 속에서도 붉게 피어나는 연꽃 한 송이를 여러분 가슴에 살포시 얹어 드리고 싶어서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오는 2026년 1월 1일부터 5일까지 인사동 한국미술관 2층에서 기다릴게요. 겨울 바람이 차가워도, 이 연꽃은 따뜻하게 피어 있을 테니, 부디 오셔서 꽃잎에 손끝 한 번만 대 보고 가세요. 그 순간, 2026년 병오년 "붉은 말의 해" 이미 여러분의 것이 될 겁니다.” 이 연꽃은 진흙을 밟고 선 우리네 어머니다. 발이 빠개져도, 허리가 휘어도 한 송이 붉은 꽃을 피워 올리는 그리움 그 자체다. 분홍 꽃잎이 살짝 벌어질 때 할머니가 새벽녘에 불을 밝히던 손때가 느껴진다. 먹빛 연잎 사이로 스민 차가운 이슬은 아버지가 삼키고 삼키던 한숨이다. 그래도 꽃은 피고, 그래도 잠자리는 날아와 우리 집 마당 한복판에 행운 한 점 내려앉힌다. K-민화란 이런 것이다. 백자처럼 하얀 종이 위에 수백 년 굽은 한의 먹을 풀고 그 위에 온 국민이 함께 울던 붉은 꽃을 피우는 것. 진흙 냄새가 진동해도 꽃향기만은 끝내 사그라지지 않는 것. 내 이름도 연꽃이다. 홍명紅明. 진흙 속에서 붉게 빛나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