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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총사 칼럼] 연꽃 위에 새긴 공空의 언어

- 서필교 작가의 연화도 반야심경을 그리다.

K-민화 김학영 기자 |  연꽃은 늘 진흙에서 피어나지만, 그 꽃잎에는 한 점의 탁함도 남기지 않는다. 서필교작가의 “연화도”는 바로 이 연꽃의 속성 위에 반야심경의 문장을 얹는다. 꽃은 그림으로 피어나고, 경전은 문자로 머문다. 그러나 이 화면에서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글씨는 장식이 아니라 호흡이며, 그림은 설명이 아니라 수행의 자리다.

 

 

작품의 상단을 채운 반야심경의 문장은 금빛에 가까운 담담한 색으로 화면을 가로지른다. 과도한 강조도, 의도적인 장엄함도 없다. 대신 일정한 간격과 리듬으로 배치된 글자들은 마치 염송의 호흡처럼 차분히 이어진다. 이는 읽히기 위한 문장이기보다 머물기 위한 문장이다. 관람자는 의미를 해독하기보다, 시선과 마음을 잠시 멈추게 된다.

 

화면 하단에 자리한 연꽃 군락은 전통 민화의 어법을 따르되, 지나친 상징의 과시를 피한다. 잎은 서로 겹치며 생장의 질서를 만들고, 꽃은 피고 지는 시간을 암시한다. 색채는 맑고 절제되어 있으며, 붓질은 빠르지 않다. 이는 ‘보여주기’의 회화가 아니라 기다림의 회화다. 연꽃이 피는 속도와, 글씨가 스며드는 시간을 동일한 호흡으로 맞추고 있다.

 

이 작품에서 반야심경은 교리를 설명하지 않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문장은 해설 없이도 이미 화면 속에서 구현된다. 꽃은 형상色으로 존재하지만, 그 배치는 비어 있으며空, 글씨는 공空을 말하지만 시각적 형상色을 가진다. 서작가는 이 긴장을 해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대로 두어, 관람자가 스스로 그 사이에 머물도록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여백이다. 글씨와 꽃 사이, 꽃과 산 사이의 공간은 단순한 빈자리나 배경이 아니다. 이 여백은 반야심경의 핵심인 ‘무소득無所得’의 상태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얻으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자리, 채우지 않을 때 생겨나는 깊이가 이 화면을 지탱한다.

 

서필교 작가의 “연화도”는 불화도, 민화도, 서예 작품도 아닌 경계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 경계는 혼란이 아니라 집중을 낳는다. 이는 전통을 결합한 작품이 아니라, 전통의 태도를 현재로 옮긴 작업이다. 반야심경이 오래도록 읽혀온 이유가 교리의 정밀함만은 아니듯, 이 작품 또한 설명보다 체험을 요구한다.

 

이 그림 앞에서 우리는 묻지 않게 된다.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머물게 하는가’를.

 

연꽃 위에 새겨진 반야심경은 가르침을 내려놓는다.

대신 한 장의 화면을 통해 조용히 말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K-민화로서 가치가 이미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