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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총사 칼럼] 이명순 작가의 “K-그라피를 읽다.”

- 꽃은 서두르지 않는다.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명순 작가의 K-그라피 앞에 서면, 우리는 먼저 읽지 않게 된다. 읽으려는 마음이 먼저 내려앉는다. 이 작품은 글씨가 아니라 시간의 자세로 우리를 맞는다.

 

 

연한 하늘빛 여백 위로 번지는 노란 산수유의 기척. 그 가지는 뻗지 않고 머문다. 머무는 동안, 꽃은 이미 말을 끝냈다는 듯 조용하다. 이 고요 속에서 글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획은 빠르지 않고, 문장은 설명하지 않는다.

 

이명순 작가의 K-그라피는 무엇을 말하기보다 어떻게 기다리는가를 보여준다.

 

글씨는 보통 결론을 향해 달린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문장들은 도착을 미루는 법을 안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앞서지 않으며, 서로를 밀치지 않는다. 마치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속삭이듯...

 

산수유는 겨울 끝에서 가장 먼저 피지만, 자신을 봄이라 주장하지 않는다. 그 겸손한 선행先行의 태도가 이 작품의 문장과 닮아 있다. 꽃은 먼저 피되, 먼저 말하지 않는다. 글은 먼저 쓰였으되, 먼저 다가서지 않는다.

 

여기서 K-그라피는 디자인의 영역을 넘어 윤리의 언어가 된다. 획의 굵기에는 힘이 있지만 과시가 없고, 먹의 번짐에는 감정이 있으되 과잉이 없다. 말하되 상처내지 않는 문장, 보이되 압도하지 않는 형식.

 

 

그래서 이 글씨는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곁에 남는다.

 

작품 속 문장들은 “지금 충분히 애쓰고 있다”는 말을 직접 건네지 않는다. 그 대신, “너의 속도로 와도 된다”는 공간을 남긴다. 이 여백이야말로 이명순 작가의 K-그라피의 가장 큰 문장이다.

 

오늘의 세계는 끊임없이 성과를 요구한다. 빨리 피고, 빨리 말하고, 빨리 증명하라고 재촉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조용히 반문한다. “꽃이 피는 데, 누가 마감 시간을 정했는가.”

 

 

K-그라피는 여기서 캘리그라피의 미학을 넘어 삶의 태도를 호출한다. 한글은 다시,
읽히기 위한 문자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한 형식이 된다.

 

이명순 작가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잠시 멈춘다. 그리고 알게 된다. 서두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도착해 있다는 것을...

 

꽃은 그렇게 말한다.
글씨도 그렇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