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화 이성준 기자 | k-민화에서 정원은 늘 말이 없는 장소였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삶의 원칙이 숨 쉬고 있었다. 김건하 작가의 ‘화정도’는 그 오래된 침묵을 다시 불러낸다. 이 그림 속 정원에는 위계가 없다. 당근과 가지가 꽃보다 낮지 않고, 국화와 작약이 채소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나비와 곤충은 장식처럼 머무르지 않고, 순환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이는 질서가 없는 세계가 아니라, 서열이 필요 없는 세계다. 민화는 원래 삶의 그림이었다. 김건하는 그 사실을 과장하지 않는다. 상서도, 길상도라는 이름으로 덧칠된 해석을 걷어내고, 생활의 본래 자리로 그림을 되돌린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눈을 압도하는 화려함 대신, 마음을 붙드는 균형이 있다. 당근은 땅속에서 자라난다. 보이지 않는 시간 동안 뿌리를 키운 뒤에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가지는 소리 없이 열매를 맺고, 꽃은 피되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는다. 김건하 작가의 화정도는 이 평범한 존재들의 태도를 통해 말한다. 삶의 중심은 늘 조용한 곳에 있다고. 그 위를 오가는 나비와 곤충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그러나 그 짧은 체류가 있어 정원은 살아 움직인다. 먹고사는 문제와 아름다움은 이
K-민화 이존영 기자 | 연꽃은 언제나 말이 적은 상징이었다. 진흙에서 피어나되 진흙을 말하지 않고, 물 위에 서되 물을 가르지 않는다. 정선영 작가의 '연화도'는 이 연꽃의 태도를 그림 전체의 호흡으로 확장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연꽃은 주인공이지만, 결코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에 서서 계절을 건너는 존재로 그려진다. 작품의 화면을 가득 채운 연잎은 겹겹이 포개지며 숲처럼 서 있다. 크고 작은 잎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위로 치솟은 줄기는 경쟁하지 않고, 물 위의 수면은 흔들리되 요란하지 않다. 이 질서는 인위적으로 배치된 조화가 아니라, 오래 지켜본 자연의 리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꽃 사이를 건너는 시간으로 정선영 작가의 '연화도'에서 중요한 것은 꽃의 만개가 아니라 과정이다. 봉오리는 아직 열리지 않았고, 이미 진 꽃도 있다. 잎 아래에서는 물새가 쉬고, 하늘에서는 새가 지나간다. 모든 것은 동시에 완성되지 않는다. 이 그림은 그 사실을 서두르지 않고 보여준다. 연꽃은 불교적 상징으로 자주 해석되지만, 이 작품은 교리보다 생활의 감각에 가깝다. 깨달음의 표식이 아니라, 오늘을 견디는 방식에 대한 은유다. 연잎 위에 고인 물
K-민화 이존영 기자 | 칸초아리나는 벨라루스에서 온 유학생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K-민화를 익히고 배우며 전통 회화가 지닌 상징과 정신성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흡수해 온 작가다. 그가 그린 k-민화는 늘 큰 것을 그리면서도, 진실은 작은 곳에 숨겨왔다. '도마뱀 나들이'는 그 전통을 가장 섬세한 방식으로 이어간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위엄도 상징도 아닌, 일상 속의 작은 생명이다. 그러나 이 작음은 미약함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정확한 비중으로 제시된다. 괴석 위에 올라선 도마뱀의 자세는 느긋하고 단정하다. 포식도 도주도 아닌, 관찰의 태도다. 눈은 크게 열려 있으되 공격적이지 않고, 몸은 길게 늘어졌으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안정감은 자연과의 거리 조절에서 나온다. 도마뱀은 바위를 정복하지도, 꽃을 짓밟지도 않는다. 그저 그 사이에 정확히 놓여 있다. 괴석의 절단된 면과 그 틈에서 피어난 꽃들은 대비를 이룬다. 거침과 부드러움, 무게와 향기. 그러나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증명한다. 상처 난 돌이 있어 꽃이 더 선명해지고, 꽃의 존재로 돌의 거칠음이 의미를 얻는다. 이는 자연의 윤리와 공존은 타협이 아니라 배치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그 본질은 권좌가 아니라 질서의 중심이었다. 이미형 작가의 '황금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황금’이라는 선택으로 다시 세운다. 금빛은 장식이 아니라 선언이다. 흔들리는 시대에 중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다. 검은 바탕 위에 떠오른 원형의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된 우주다. 해와 달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산은 높되 과시하지 않고, 물은 흐르되 넘치지 않는다. 모든 요소는 자기 몫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의 합의를 이룬다. 이 합의가 바로 나라의 기틀이었고, 오늘의 삶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금빛은 ‘부’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으로 읽힌다. 수없이 겹친 선과 결 위에 올라앉은 금은, 빠른 성취가 아닌 오래 견딘 결과의 색이다. 검은 바탕은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대비가 아니라, 빛이 태어나기까지의 밤이다. 밤을 통과한 빛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화면은 말없이 증명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운다. 왕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자연의 순환이 자리를 채운다. 이는 권위의 공백이 아니라, 권위의 재정의다.
K-민화 이존영 기자 | '태평성시도'는 조용히 묻는다. “태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사람이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웃는 사람, 다투는 사람, 건너는 사람, 나르는 사람. 송정혜 작가의 '태평성시도'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작동하는 사회’를 그린 그림이다. 태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과 관계가 쌓여 만들어지는 풍경임을 이 그림은 말한다. 화면은 빽빽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다리는 제 역할을 하고, 물은 흐르며, 장터는 소란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생활이 있다. 민화적 시선은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협력의 장면들’이다. 통나무를 나르는 손, 다리 아래서 물을 가르는 몸, 장터에서 음식을 나누는 얼굴들. 태평은 정적靜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율되는 역동적 균형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화롭지만 정지돼 있지 않다. K-민화는 전통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전통을 다시 사용한다. '태평성시도'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 속 호랑이는 늘 질문을 던지는 존재였다. 권력의 상징이면서도 풍자의 대상이었고, 공포의 형상이면서도 익살의 얼굴을 지녔다. 그러나 이미형 교수의 '맹호도'에서 호랑이는 웃지 않는다. 대신 침묵한다. 이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긴장이다. 작품 속 맹호는 포효하지 않는다.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몸은 낮게 웅크렸고, 꼬리는 팽팽하게 말려 있다. 모든 힘은 밖으로 분출되지 않고 안으로 수렴된다. 이 호랑이는 공격 이전의 순간, 결단 직전의 정적을 품고 있다. 민화에서 보기 드문 이 태도는, 호랑이를 ‘힘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 통제의 상징으로 전환시킨다. 이 작품의 밀도는 선에서 나온다. 한 올 한 올 쌓아 올린 털의 묘사는 장식이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반복되는 붓질은 시간의 축적이며, 그 시간은 곧 인내의 흔적이다. 이미형의 맹호는 빠르게 완성된 힘이 아니다. 오래 견딘 힘, 쉽게 흩어지지 않는 힘이다. 눈빛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정면을 응시하지만 위협하지 않는다. 응시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잡기 위한 시선에 가깝다. 이 눈은 바깥을 향하지 않는다. 안쪽을 향해 있다. 그래서 이 맹호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그림 앞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게 된다. 노지영 작가의 '화조도'는 한 계절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생명이 머무는 방식을 조용히 들려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매화 가지와 꽃, 그리고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새들은 ‘움직임’보다 ‘공존’을 먼저 말한다. 화조도는 민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르다. 왕도, 신선도, 호랑이도 아닌 꽃과 새. 일상의 풍경이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언어다. 그러나 노지영의 화조도는 단순한 길상吉祥의 나열이 아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하나의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를 기준으로 수많은 생명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며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나무의 줄기는 굽이치되 흔들리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처럼 패인 옹이와 뒤틀린 가지는 생의 굴곡을 닮았고, 그 위에 핀 매화는 시련 이후에 오는 단단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꽃은 만개했지만 과시하지 않고, 새들은 날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모두가 자기 몫의 봄을 살고 있을 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새들의 배치다. 까치, 제비, 원앙, 이름 모를 작은 새들까지 이들은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 어떤 새는 날고, 어떤 새는 쉬며, 어떤 새는 서로를 바
K-민화 이존영 기자 | 연꽃은 늘 물 위에 있지만, 그 뿌리는 가장 낮은 곳에 닿아 있다. 이윤희 작가의 '연화도'는 바로 그 낮음에서 시작되는 상승을 화면 전체의 리듬으로 펼쳐 보인다. 세로로 길게 뻗은 화면에는 연잎과 연꽃이 층층이 배치되고, 그 꼭대기에는 물총새 한 쌍이 날아든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다. 삶의 단계와 마음의 이동 경로를 은유적으로 그린 하나의 서사다. 연꽃은 멈추지 않고 피어난다. 이 작품 속 연꽃은 만개와 봉오리, 그리고 막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까지를 모두 품고 있다. 피어 있음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한 장면일 뿐이라는 듯, 연꽃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산다. 이것이 민화가 말하는 시간의 윤리다. 앞선 꽃이 뒤의 꽃을 가리지 않고, 아래의 봉오리가 위를 시기하지 않는다. 이윤희 작가는 이 질서를 과장하지 않는다. 담담한 선과 절제된 채색으로, 연꽃이 지닌 자기 완결의 품격을 드러낼 뿐이다. 물총새, 고요를 깨우는 의지 연화도에서 물총새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정확히 목표를 향해 급강하하는 이 새는 결단과 집중의 상징이다. 연꽃 위를 스쳐 날아드는 물총새의 움직임은, 고요한 화면에 긴장을 부여하며 말한다.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작품은 감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마주함을 요구한다. 무속인 아랑이 그려낸 이 푸른 용은 장식적 상징도, 길상의 도상도 아니다. 이는 부름에 응답해 나타난 존재, 다시 말해 주술적 호출의 결과물이다. 작품 속 용은 고요하지 않다. 구름을 가르며 출현한 푸른 비늘의 몸체는 상승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그 움직임에는 긴장과 각성이 동시에 흐른다. 전통 회화에서 용은 왕권과 복을 상징했으나, 아랑의 용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이다. 이 용은 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질서를 흔들고 기운을 전환하는 존재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용의 시선이다.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붉은 구슬을 향해 몸을 틀고 있다. 이 구슬은 흔히 여의주로 해석되지만, 아랑의 세계관에서는 단순한 소망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집중된 기운의 핵, 혹은 인간과 세계를 잇는 매개체에 가깝다. 구슬 주위로 흩어지는 붉은 기운은 축복이 아니라 경고처럼 읽힌다. 다루지 못한 힘은 곧 화火가 된다는 무속적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구름 또한 중요하다. 이 작품에서 구름은 배경이 아니라 장막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사이를 가르는 경계이자, 신령이 드나드는 통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