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화 이존영 기자 | 바다는 늘 흔들린다. 그러나 흔들림 위에 선 존재가 있다. 신지연 작가의 '해응영일도'는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된다. 파도가 부서지는 절벽 끝, 독수리는 날지 않는다. 대신 선다. 이 그림에서 비상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다.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은 희망의 은유이되, 감상적이지 않다. 붉은 태양은 응시의 대상이고, 독수리는 그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민화 속 영웅은 언제나 과장된 힘을 갖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리를 정확히 알고,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해응영일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결기의 형상이다. 파도는 시련을, 바위는 책임을 뜻한다. 그 위에 선 독수리는 ‘지금’의 무게를 견디는 존재다. 이 장면에서 K-민화는 과거의 길상吉祥을 오늘의 태도로 바꿔 놓는다. 희망은 도망치지 않고, 현실 위에 선다. 신지연 작가의 작품은 절제되어 있다. 색은 낮고, 선은 분명하다. 이는 감정을 부풀리기보다 판단을 또렷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그림은 위로보다 각성을 택한다. “날아오를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서 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K-민화는 삶의 가장 험한 자리에서도 품격을 잃지
K-민화 이존영 기자 | '태평성시도'는 조용히 묻는다. “태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사람이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웃는 사람, 다투는 사람, 건너는 사람, 나르는 사람. 송정혜 작가의 '태평성시도'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작동하는 사회’를 그린 그림이다. 태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과 관계가 쌓여 만들어지는 풍경임을 이 그림은 말한다. 화면은 빽빽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다리는 제 역할을 하고, 물은 흐르며, 장터는 소란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생활이 있다. 민화적 시선은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협력의 장면들’이다. 통나무를 나르는 손, 다리 아래서 물을 가르는 몸, 장터에서 음식을 나누는 얼굴들. 태평은 정적靜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율되는 역동적 균형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화롭지만 정지돼 있지 않다. K-민화는 전통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전통을 다시 사용한다. '태평성시도'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복’은 언제나 멀리 있지 않았다. 빌고, 기다리고, 애써 끌어오는 대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드는 상태에 가까웠다. 김태연 작가의 '넝쿨째 굴러온 복'은 그 오래된 민화의 감각을 오늘의 언어로 환하게 되살린다. 작품 속에는 두 개의 복주머니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노란 바탕 위에 ‘복(福)’ 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오색의 결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두 주머니는 경쟁하지 않는다. 크기를 자랑하지도, 더 많은 것을 담으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하다. 주머니 안에 담긴 과일들은 풍요의 상징이지만, 과잉은 없다. 석류와 감, 포도와 복숭아는 계절처럼 배치되고, 삶의 주기를 닮아 있다. 이는 “많이 가져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잘 차려진 하루를 살라”는 조용한 권유에 가깝다. 특히 주목할 점은 화면을 감싸는 넝쿨과 연꽃이다. 넝쿨은 스스로 자라되 억지로 뻗지 않고,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소란 없이 핀다. 이 그림에서 복은 갑작스러운 행운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굴러오는 결과다. 그래서 제목의 ‘넝쿨째’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사회는 복을 숫자
K-민화 이존영 기자 | 연꽃은 늘 물 위에 있지만, 그 뿌리는 가장 낮은 곳에 닿아 있다. 이윤희 작가의 '연화도'는 바로 그 낮음에서 시작되는 상승을 화면 전체의 리듬으로 펼쳐 보인다. 세로로 길게 뻗은 화면에는 연잎과 연꽃이 층층이 배치되고, 그 꼭대기에는 물총새 한 쌍이 날아든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다. 삶의 단계와 마음의 이동 경로를 은유적으로 그린 하나의 서사다. 연꽃은 멈추지 않고 피어난다. 이 작품 속 연꽃은 만개와 봉오리, 그리고 막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까지를 모두 품고 있다. 피어 있음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한 장면일 뿐이라는 듯, 연꽃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산다. 이것이 민화가 말하는 시간의 윤리다. 앞선 꽃이 뒤의 꽃을 가리지 않고, 아래의 봉오리가 위를 시기하지 않는다. 이윤희 작가는 이 질서를 과장하지 않는다. 담담한 선과 절제된 채색으로, 연꽃이 지닌 자기 완결의 품격을 드러낼 뿐이다. 물총새, 고요를 깨우는 의지 연화도에서 물총새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정확히 목표를 향해 급강하하는 이 새는 결단과 집중의 상징이다. 연꽃 위를 스쳐 날아드는 물총새의 움직임은, 고요한 화면에 긴장을 부여하며 말한다.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 속 고양이는 늘 흥미로운 존재다. 쥐를 잡지 않거나, 호랑이 옆에서 태연히 눕고, 때로는 세상의 이치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얼굴로 화면 한켠을 차지한다. 고희진 작가의 '황묘농접도' 속 고양이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이 고양이는 사냥하지 않는다. 나비를 올려다보는 황묘의 시선에는 긴장도 욕망도 없다. 도약 직전의 근육은 보이지만, 움직임은 멈춰 있다. 이는 실패한 사냥의 순간이 아니라, 사냥 자체를 선택하지 않은 상태다. 이 미묘한 정지는 작품 전체의 기조를 결정한다. 전통 민화에서 고양이와 나비의 조합은 다산, 풍요, 장수를 암시하기도 하지만, 고희진의 화면에서는 상징보다 태도가 먼저 읽힌다. 고양이는 나비를 쫓지 않음으로써 이미 충분하다. 꽃은 피어 있고, 풀은 자라 있으며, 바람은 흐른다. 이 세계에는 결핍이 없다. 배경의 흙빛 바탕은 소란을 거두어낸 시간의 색이다. 채도가 낮아질수록 존재는 또렷해진다. 바위는 크지 않고, 꽃은 과장되지 않으며, 나비는 화면을 지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자기 몫만큼만 존재한다. 이것이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이다. 오늘의 삶은 끊임없이 ‘쫓으라’고 말한다. 더 빨리, 더 많이,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화병은 단순한 장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담는 그릇이며, 하루의 마음을 세워 두는 자리다. 공재완 작가의 '화병도'는 이 오래된 인식을 현대의 감각으로 단정하게 복원한다. 작품 속 모란은 흐드러지되 흐트러지지 않고, 화병은 화려하되 소란스럽지 않다. 모든 요소가 제자리를 알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그림 전반을 감싼다. 모란은 말한다. 부귀와 영화는 과시가 아니라 지속의 결과라고. 겹겹의 꽃잎은 시간의 층위를 닮았고, 가지의 방향은 무질서가 아닌 리듬을 따른다. 공재완은 꽃의 크기를 키우기보다, 균형의 감각을 키운다. 그래서 이 화병도는 ‘보여 주는 그림’이 아니라 ‘곁에 두는 그림’이 된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화병과 받침대의 처리다. 문양은 정교하되 절제되어 있고, 금색은 빛나되 앞서지 않는다. 이는 민화가 지닌 생활 미학의 집 안의 풍경과 마음의 질서를 함께 가꾸는 태도를 충실히 잇는다. 화병은 중심을 잡고, 꽃은 그 중심 위에서 호흡한다. 삶의 중심과 기쁨의 확장이 분리되지 않는 구조다. 색채는 부드럽게 호흡하며, 여백은 말이 없다. 그러나 그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여유다. 보는 이는 해석을 강요받지 않고, 자연스레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의 고양이는 늘 모순을 품는다. 온순함과 야성, 정적과 도약, 놀이와 사냥의 경계에 선 존재. 안경화 작가의 '화묘도'는 이 오래된 상징을 한 장면의 리듬으로 엮어, 삶의 ‘지금’을 포착한다. 작품 위에는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하나는 가지 위에서 몸을 낮추고, 다른 하나는 땅 위에서 시선을 들고 선다. 위와 아래, 잠복과 관조. 이 대비는 우열이 아니라 역할의 교차다. 민화가 말하는 세계는 늘 그렇듯,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여러 중심의 공존으로 이루어진다. 나비와 잠자리는 움직임의 신호다. 공중을 가르는 작은 생명은 화면에 긴장을 불어넣고, 고양이의 시선은 그 긴장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린다. 이때 고양이는 사냥꾼이기 이전에 관찰자가 된다. 급하지 않고, 소리 없이. 안경화 작가는 이 느린 호흡으로 k-민화의 미학을 오늘의 감각에 맞춰 낮춘다. 꽃은 아래에서 피어 오른다. 붉고 분홍의 화훼는 장식이 아니라 완충의 장치다. 야성의 긴장을 부드럽게 받치며, 화면의 균형을 회복시킨다. 민화의 꽃은 늘 그렇게 기능한다. 극적인 순간을 과장하지 않고, 머물 수 있게 만드는 자리로. 색채는 절제되어 있다. 고양이의 털결은 세밀하되 요
K-민화 이성준 기자 | K-민화에서 말은 언제나 속도의 상징이었다. 출세, 합격, 입신양명. 말은 인간의 욕망을 태우고 가장 빠르게 달리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지연 작가의 '복마福馬'는 다르다. 이 말은 달리지 않는다. 대신 단단히 ‘서’ 있다. 작품 중앙의 백마는 힘찬 질주 대신 균형 잡힌 자세로 자리한다. 말의 등 위에는 책과 문방구, 붓과 종이가 정갈하게 놓여 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복이란 우연히 굴러오는 행운이 아니라, 공부와 준비, 일상의 축적 위에 놓이는 것임을 말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복福’의 배치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복은 외부에서 날아오지 않는다. 말의 몸, 책의 무게, 도구의 질서 속에 이미 내재해 있다. 복은 목표가 아니라 상태이며, 결과가 아니라 태도다. 이것이 이지연의 복마가 전통 민화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책거리와 말의 결합, 생활 민화의 진화의 복마는 책거리의 상징 체계를 차용하면서도 이를 한 단계 확장한다. 책은 지식이고, 붓은 실천이며, 말은 이동이다. 이 세 요소가 한 화면에 공존할 때, 민화는 더 이상 과거의 길상도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의 생활 철학이 된다. 말 아래에 배치된 꽃문 장식과 둥근 기물
K-민화 이존영 기자 | 민화에서 길조는 요란하지 않다. 번개처럼 나타나 삶을 바꾸는 존재가 아니라, 알아보는 사람에게만 먼저 다가오는 징조다. 조소연 작가의 '화과길조'는 바로 그 ‘조용한 도착’의 순간을 한 폭의 평온으로 붙잡는다. 작품에는 석류와 꽃, 그리고 한 마리 새가 있다. 구성은 단출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 축복의 문법이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석류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이지만, 이 그림에서는 이미 터진 열매가 아닌 익어가는 과정에 머문다. 꽃은 만개하지도, 시들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과하지 않은 지금’에 머물러 있다. 가지 위에 앉은 길조는 노래하지 않는다. 날갯짓도 없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무른다. 이 머묾이야말로 이 작품의 핵심이다. 좋은 소식은 늘 바쁜 사람에게서 비켜가고, 고요를 지킬 줄 아는 사람에게 먼저 깃든다. 조소연 작가의 길조는 그 사실을 몸으로 증명한다. 배경의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여백은 기다림의 시간이고, 숨을 고르는 삶의 리듬이다. 바탕의 온화한 색감은 계절의 중간 지점을 떠올리게 하며, ‘지금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감각을 조용히 전달한다. 오늘의 사회는 늘 결과를 재촉한다. 성과를 증명하라, 속도를 높이라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귀수龜壽는 단순한 장수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대하는 태도이며, 삶을 축적하는 방식이다. 이한나 작가의 '모란귀수도'는 바로 그 태도를 한 화면에 단단히 쌓아 올린 작품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거북이 있다. 그러나 이 거북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지탱한다. 그 등 위에 놓인 것은 책과 문방구, 상자와 도구들, 지식과 기술, 그리고 생활의 흔적이다. 빠르게 소비되는 정보가 아니라, 오래 곁에 두고 익혀야 할 것들이다. 거북의 느린 걸음은 이 모든 것의 필요조건처럼 보인다. 모란은 화면 위에서 피어 있다. 화려하지만 과장되지 않고, 중심을 침범하지 않는다. 민화에서 모란은 부귀의 상징이지만, 이 작품에서의 모란은 결과에 가깝다. 충분한 시간과 인내가 쌓인 뒤에야 허락되는 꽃. 그래서 모란은 서두르지 않는다. 문양과 질감은 치밀하다. 나무결, 직물의 반복, 기하학적 장식은 손의 시간을 증명한다. 이는 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노동의 윤리다.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다른 것을 버리지 않는 태도의 이한나 작가는 그 태도를 화면 전체의 구조로 삼는다. 이 작품의 흥미는 균형에 있다. 무거운 것은 아래에서 받치고, 가벼운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