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화 강경희 기자 | ‘대부귀 모란도’는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기에, 자칫하면 화려함은 욕망으로 오해되고, 장식은 의미를 가릴 수 있다. 그러나 김정연의 ‘대부귀 모란도’는 이 오래된 위험을 정면으로 통과한다. 이 작품의 부귀는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상태로 드러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모란은 크고 풍성하지만, 결코 요란하지 않다. 색은 부드럽게 겹치고, 꽃잎 하나하나는 절제된 호흡으로 피어난다. 이는 ‘많음’을 자랑하는 방식이 아니라, 충분함을 누리는 태도에 가깝다. 김정연의 모란은 보여주기 위해 피지 않는다. 스스로의 시간을 다 채웠기에 피어난다. 특히 주목할 것은 화면 하단의 괴석이다. 민화에서 괴석은 자연의 기운이 응축된 상징이다. 이 작품에서 괴석은 단순한 받침이 아니라, 부귀를 떠받치는 근원으로 자리한다. 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세계, 뿌리와 돌, 시간과 무게가 함께 있어야 가능한 풍요를 말없이 증언한다. 화려한 꽃과 묵직한 괴석의 대비는 이 작품을 장식화가 아닌 사유의 화면으로 끌어올린다. 대한민국명인연합회 초청 개인전이라는 자리에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분명하다. 명인이란 기술의 완성도가 아니라, 상징을 다루는 태도의 성숙으로 증명된다. 김
K-민화 이존영 기자 | 칸초아리나는 벨라루스에서 온 유학생으로, 한국에 머무는 동안 K-민화를 익히고 배우며 전통 회화가 지닌 상징과 정신성을 자신의 조형 언어로 흡수해 온 작가다. 그가 그린 k-민화는 늘 큰 것을 그리면서도, 진실은 작은 곳에 숨겨왔다. '도마뱀 나들이'는 그 전통을 가장 섬세한 방식으로 이어간다. 작품 속의 주인공은 위엄도 상징도 아닌, 일상 속의 작은 생명이다. 그러나 이 작음은 미약함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정확한 비중으로 제시된다. 괴석 위에 올라선 도마뱀의 자세는 느긋하고 단정하다. 포식도 도주도 아닌, 관찰의 태도다. 눈은 크게 열려 있으되 공격적이지 않고, 몸은 길게 늘어졌으나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안정감은 자연과의 거리 조절에서 나온다. 도마뱀은 바위를 정복하지도, 꽃을 짓밟지도 않는다. 그저 그 사이에 정확히 놓여 있다. 괴석의 절단된 면과 그 틈에서 피어난 꽃들은 대비를 이룬다. 거침과 부드러움, 무게와 향기. 그러나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증명한다. 상처 난 돌이 있어 꽃이 더 선명해지고, 꽃의 존재로 돌의 거칠음이 의미를 얻는다. 이는 자연의 윤리와 공존은 타협이 아니라 배치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 속 호랑이는 늘 질문을 던지는 존재였다. 권력의 상징이면서도 풍자의 대상이었고, 공포의 형상이면서도 익살의 얼굴을 지녔다. 그러나 이미형 교수의 '맹호도'에서 호랑이는 웃지 않는다. 대신 침묵한다. 이 침묵이야말로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긴장이다. 작품 속 맹호는 포효하지 않는다. 발톱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몸은 낮게 웅크렸고, 꼬리는 팽팽하게 말려 있다. 모든 힘은 밖으로 분출되지 않고 안으로 수렴된다. 이 호랑이는 공격 이전의 순간, 결단 직전의 정적을 품고 있다. 민화에서 보기 드문 이 태도는, 호랑이를 ‘힘의 상징’이 아니라 자기 통제의 상징으로 전환시킨다. 이 작품의 밀도는 선에서 나온다. 한 올 한 올 쌓아 올린 털의 묘사는 장식이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반복되는 붓질은 시간의 축적이며, 그 시간은 곧 인내의 흔적이다. 이미형의 맹호는 빠르게 완성된 힘이 아니다. 오래 견딘 힘, 쉽게 흩어지지 않는 힘이다. 눈빛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정면을 응시하지만 위협하지 않는다. 응시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잡기 위한 시선에 가깝다. 이 눈은 바깥을 향하지 않는다. 안쪽을 향해 있다. 그래서 이 맹호
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그 본질은 권좌가 아니라 질서의 중심이었다. 이미형 작가의 '황금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황금’이라는 선택으로 다시 세운다. 금빛은 장식이 아니라 선언이다. 흔들리는 시대에 중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다. 검은 바탕 위에 떠오른 원형의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된 우주다. 해와 달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산은 높되 과시하지 않고, 물은 흐르되 넘치지 않는다. 모든 요소는 자기 몫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의 합의를 이룬다. 이 합의가 바로 나라의 기틀이었고, 오늘의 삶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금빛은 ‘부’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으로 읽힌다. 수없이 겹친 선과 결 위에 올라앉은 금은, 빠른 성취가 아닌 오래 견딘 결과의 색이다. 검은 바탕은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대비가 아니라, 빛이 태어나기까지의 밤이다. 밤을 통과한 빛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화면은 말없이 증명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운다. 왕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자연의 순환이 자리를 채운다. 이는 권위의 공백이 아니라, 권위의 재정의다.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그림 앞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게 된다. 노지영 작가의 '화조도'는 한 계절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생명이 머무는 방식을 조용히 들려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매화 가지와 꽃, 그리고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새들은 ‘움직임’보다 ‘공존’을 먼저 말한다. 화조도는 민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르다. 왕도, 신선도, 호랑이도 아닌 꽃과 새. 일상의 풍경이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언어다. 그러나 노지영의 화조도는 단순한 길상吉祥의 나열이 아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하나의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를 기준으로 수많은 생명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며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나무의 줄기는 굽이치되 흔들리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처럼 패인 옹이와 뒤틀린 가지는 생의 굴곡을 닮았고, 그 위에 핀 매화는 시련 이후에 오는 단단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꽃은 만개했지만 과시하지 않고, 새들은 날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모두가 자기 몫의 봄을 살고 있을 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새들의 배치다. 까치, 제비, 원앙, 이름 모를 작은 새들까지 이들은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 어떤 새는 날고, 어떤 새는 쉬며, 어떤 새는 서로를 바
K-민화 이존영 기자 | 연꽃은 늘 물 위에 있지만, 그 뿌리는 가장 낮은 곳에 닿아 있다. 이윤희 작가의 '연화도'는 바로 그 낮음에서 시작되는 상승을 화면 전체의 리듬으로 펼쳐 보인다. 세로로 길게 뻗은 화면에는 연잎과 연꽃이 층층이 배치되고, 그 꼭대기에는 물총새 한 쌍이 날아든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다. 삶의 단계와 마음의 이동 경로를 은유적으로 그린 하나의 서사다. 연꽃은 멈추지 않고 피어난다. 이 작품 속 연꽃은 만개와 봉오리, 그리고 막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까지를 모두 품고 있다. 피어 있음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한 장면일 뿐이라는 듯, 연꽃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산다. 이것이 민화가 말하는 시간의 윤리다. 앞선 꽃이 뒤의 꽃을 가리지 않고, 아래의 봉오리가 위를 시기하지 않는다. 이윤희 작가는 이 질서를 과장하지 않는다. 담담한 선과 절제된 채색으로, 연꽃이 지닌 자기 완결의 품격을 드러낼 뿐이다. 물총새, 고요를 깨우는 의지 연화도에서 물총새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정확히 목표를 향해 급강하하는 이 새는 결단과 집중의 상징이다. 연꽃 위를 스쳐 날아드는 물총새의 움직임은, 고요한 화면에 긴장을 부여하며 말한다.
K-민화 이존영 기자 | '태평성시도'는 조용히 묻는다. “태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사람이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웃는 사람, 다투는 사람, 건너는 사람, 나르는 사람. 송정혜 작가의 '태평성시도'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작동하는 사회’를 그린 그림이다. 태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과 관계가 쌓여 만들어지는 풍경임을 이 그림은 말한다. 화면은 빽빽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다리는 제 역할을 하고, 물은 흐르며, 장터는 소란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생활이 있다. 민화적 시선은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협력의 장면들’이다. 통나무를 나르는 손, 다리 아래서 물을 가르는 몸, 장터에서 음식을 나누는 얼굴들. 태평은 정적靜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율되는 역동적 균형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화롭지만 정지돼 있지 않다. K-민화는 전통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전통을 다시 사용한다. '태평성시도'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공작은 부귀와 영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현숙 작가의 '비파공작'은 이 익숙한 상징을 한 단계 낮은 음역으로 끌어내린다. 이 작품에서 공작은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눈부시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다. k-민화가 지켜온 절제의 미학이 이 작품의 화면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비파나무 아래, 공작은 기다린다. 비파는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나무다. 꽃과 열매, 잎이 한꺼번에 존재하는 이 식물은 ‘축적된 시간’을 상징한다. 한현숙은 공작을 비파나무 곁에 둠으로써, 부귀를 단발의 행운이 아닌 인내의 결과로 다시 정의한다. 공작의 꼬리는 펼쳐지지 않았다. 대신 바위에 기대어 흐르듯 내려온다. 이는 승리를 과시하는 몸짓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아는 존재의 태도다. 색은 많되, 소리는 낮다. 이 작품의 색채는 분명 풍부하다. 청록, 남색, 금빛, 그리고 비파 열매의 따뜻한 황색이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그 조합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지킨다. k-민화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왔다. 아름다움은 높일수록 값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될수록 깊어진다고... 두 마리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실은 왕을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가 지켜야 할 질서를 그린 그림이었고, 인간 위에 놓인 자연의 법칙을 시각화한 우주도였다. 정선영 작가의 ‘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호흡하게 만든다. 화면을 가르는 짙은 밤하늘, 그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은 낮과 밤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의 약속처럼 배치된다. 어느 한쪽도 중심을 독점하지 않는다. 균형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오봉은 산이 아니라 원칙의 형태다. 다섯 봉우리는 위계를 이루지 않으며,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파도는 멈추지 않고 흐르되 넘치지 않고, 폭포는 떨어지되 소란스럽지 않다. 이는 힘의 과시가 아니라, 질서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색의 절제다. 전통 일월오봉도의 상징색을 유지하면서도, 과도한 장식 대신 리듬과 반복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는 왕권의 위엄을 강조하기보다, 국가와 개인을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을 드러내려는 태도에 가깝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중심을 요구한다. 누가 중심인가,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다. 그러나 정선영의 일월오봉는 다른 질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