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화 이존영 기자 | 모란은 늘 부귀의 상징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연희 작가의 '괴석모란'에서 모란은 단순한 풍요의 꽃이 아니다. 이 꽃은 견딘 자리에서 피어난 결과다. 작품 아래를 차지한 괴석들은 매끈하지 않고, 아름답지도 않다. 바람과 비, 시간을 견뎌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위에 모란이 선다. 화려함은 위에서 오지 않고, 아래의 무게에서 자라난다. 이 작품에서 괴석은 배경이 아니라 주체다. 뒤틀린 돌의 윤곽은 삶의 굴곡을 닮았고, 모란의 줄기는 그 굴곡을 피해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틈을 비집고 올라와 꽃을 맺는다. 이는 “잘 갖춰진 자리에서의 성공”이 아니라, 버틴 시간 위에 얹힌 성취를 말한다. 꽃의 색 또한 의미심장하다. 자주와 황금의 대비는 과시가 아닌 축적의 색이다. 같은 모란이 반복되지만 단조롭지 않은 이유는, 각 꽃이 서 있는 돌의 결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반복은 획일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리듬을 드러낸다. 부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라, 각자의 사연을 지닌 여러 얼굴로 존재한다. k-민화의 미덕은 언제나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 데 있다. 이연희 작가의 '괴석모란'은 고난을 지워버리지 않는다. 대신 고난을 지지대로 삼는다. 그
K-민화 이존영 기자 | 봉황은 함부로 날지 않는다. 태평성대가 아니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이 아니면 노래하지 않는다. 그래서 봉황은 k-민화에서 ‘권력’보다 먼저 품격의 상징으로 그려져 왔다. 김민주 작가의 '봉황도'는 이 오래된 상징을 오늘의 언어로 조용히 번역해낸 작품이다. 이 봉황은 위엄으로 군림하지 않는다. 날개를 크게 펼치지 않고, 소리를 높이지도 않는다. 대신 바위 위에 내려앉아 주변의 생명을 바라본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며, 곤충과 새들이 저마다의 궤적을 그리는 가운데 봉황은 중심에 있으되 중심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그림의 첫 번째 미덕이다. 작품의 구성은 위로 치솟기보다 아래로 뿌리내린 질서를 따른다. 바위는 흔들림 없는 토대처럼 봉황을 받치고, 그 위에 피어난 모란과 매화는 계절과 덕목을 동시에 상징한다. 모란의 풍요와 매화의 절개가 한 화면에 공존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봉황은 화려함 위에 서는 존재가 아니라, 절제된 풍요 위에 머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봉황의 깃털은 특히 인상적이다. 녹청과 주홍, 백색과 금빛이 겹겹이 쌓였지만 과장되지 않는다. 이는 기술의 과시가 아니라, 오랜 수행 끝에 도달한
K-민화 강경희 기자 | 민화의 호랑이는 늘 무섭지 않다. 아니, 오히려 웃음을 머금고 있다. 김정미 작가의 ‘까치와 호랑이’ 앞에 서면, 우리는 그 오래된 웃음의 이유를 다시 묻게 된다.이 호랑이는 포효하지 않는다. 몸집은 크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눈은 번뜩이되 잔혹하지 않다. 과장된 이빨과 둥근 눈, 다소 엉성해 보이는 자세는 권력의 허세를 슬며시 비튼다. 반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는 작지만 또렷하다. 작가는 이 대비를 통해 민화의 핵심을 정확히 짚는다. 힘은 크기에서 나오지 않고, 진실은 소리의 높낮이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까치는 전통적으로 길한 소식을 전하는 존재다. 그러나 민화 속 까치는 단순한 길조가 아니다. 때로는 세상의 부조리를 찌르는 날카로운 질문자다. 김정미의 까치는 호랑이를 내려다보며 울지도, 아부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실을 전할 뿐이다. 권력이 듣기 싫어하는 진실을, 가볍고 명료하게. 이 그림에서 호랑이는 권력의 상징이자 인간의 욕망을 닮은 얼굴이다. 강해 보이려 애쓰지만, 결국 민중의 시선 앞에서는 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는 조선 민화가 지녔던 해학의 정치학이다. 칼 대신 웃음으로, 분노 대신 풍자로 세상을 교정하는 방식. 김
K-민화 이존영 기자 | “호랑이 담배 피울 적에”라는 말은 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주문이다. 현실과 이야기가 교차하는 그 문턱에서, 우현진 작가의 호랑이는 담배를 문다. 이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가볍지 않다. 오히려 권위를 내려놓는 순간에만 드러나는 진실을 정확히 겨냥한다. 중절모를 눌러쓴 호랑이는 산군의 위엄보다 인간의 버릇을 닮았다. 담뱃대를 쥔 손놀림은 익숙하고, 시선은 예민 하다. 그러나 이 예민함은 위협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불안에 가깝다. 호랑이는 여전히 크지만,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k-민화의 오래된 장치, 까치 대신 인간의 습속, 가 권력의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 소나무 위 까치들은 재잘대지 않는다. 그들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관찰자의 위치에 선 까치들 앞에서, 호랑이는 연기를 내뿜으며 시간을 끈다. 연기는 잠시 형체를 만들었다가 곧 사라진다. 이 연무煙霧는 권위의 허상이자, 이야기의 여백이다. 담배 연기가 흐르는 동안 우리는 웃고, 그 웃음 속에서 판단을 유예한다. 색과 구도는 절제되어 있다. 황토빛 바탕은 오래된 설화를 떠올리게 하고, 붉은 해는 시간의 원점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 원점은 신화의 시작이 아니라, 해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수壽’는 숫자가 아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응답이다. 고일민 작가의 '수壽'는 이 한 글자를 시간의 기록이 아니라 생명의 합창으로 풀어낸다. 작품 속 ‘壽’자는 더 이상 문자에 머물지 않는다. 글자의 획마다 물결이 흐르고, 물고기가 헤엄치며, 거북이 천천히 시간을 건넌다. 꽃은 피고 새는 깃을 고른다. 이 모든 생명은 각자의 속도로 존재하지만,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장수는 단일한 힘이 아니라 공존의 결과임을 이 작품은 조용히 말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수’의 구조를 해체하지 않으면서도, 그 내부에 우주를 담았다는 점이다. 파도는 생의 역동을, 거북은 인내와 지속을, 물고기는 번성과 순환을 상징한다. 여기에 꽃과 과실, 새의 형상이 더해지며 ‘살아 있음’의 결이 촘촘해진다. 장수는 정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관계 맺기라는 메시지가 분명해진다. 색채 역시 과시적이지 않다. 검은 바탕은 깊이를 만들고, 그 위에 얹힌 색들은 각자의 몫만큼 빛난다. 이는 오래 산다는 것이 요란한 성취의 나열이 아니라, 차분한 누적임을 환기한다. 세월은 소리 없이 쌓이고, 그 위에 생은 단단해진
K-민화 이성준 기자 | 송학도는 오래된 약속의 그림이다. 소나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알고, 학은 시간을 건너는 법을 안다. 백찬희 작가의 '송학도'는 이 두 존재를 나란히 세워, 장수의 기원을 넘어 함께 사는 태도를 묻는다. 작품 속 소나무는 요란하지 않다. 굵은 줄기와 촘촘한 솔잎은 바람을 과시하지 않고, 학은 날갯짓을 멈춘 채 가지 위에 서 있다. 이 정적은 멈춤이 아니라 지속이다. 민화가 말해온 이상은 언제나 여기 있었다. 크게 외치지 않고, 오래 남는 것. 견딤과 건넘의 균형 백찬희 작가의 '송학도'에서 소나무는 배경이 아니다. 학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자리이며, 계절의 흔적을 감내하는 몸이다. 학은 그 위에 앉아 있다가, 필요할 때 날아오를 줄 안다. 서로의 역할은 분명하지만 위계는 없다. 견디는 자와 건너는 자가 균형을 이룬다. 이 그림의 장수는 숫자가 아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오래 같이 사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송학도는 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의 장면은 축복의 선언이 아니라 생활의 합의처럼 읽힌다. 절제된 색, 깊어진 호흡 채색은 낮고 단정하다. 청록과 백색, 갈색의 조율은 눈에 띄기보다 눈을 쉬게 한다. 깃털의 결, 솔잎의 밀도는
K-민화 이성준 기자 | 호랑이는 언제나 강하다. 그러나 박현정 작가의 '송죽설호'가 보여주는 강함은 포효의 크기가 아니라 버티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눈발이 흩날리는 설경 속, 송죽 사이를 가르며 내려오는 이 설호雪虎는 위협보다 결기를 먼저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겨울은 배경이 아니다. 겨울은 시험이며, 설호는 그 시험을 통과하는 존재다. 눈은 온 화면을 덮되 시야를 가리지 않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휘어질지언정 꺾이지 않는다. 박현정 작가는 이 자연의 질서를 통해 호랑이의 성정性情을 규정한다. 강함은 돌진이 아니라 지속이며, 용기는 소란이 아니라 침착이라는 선언이다. 호랑이의 발걸음은 낮고 무겁다. 한 발 한 발이 산의 결을 읽듯 이어진다. 이는 민화의 전통적 호랑이가 가진 해학이나 과장의 영역을 넘어, 현실의 무게를 감내하는 존재로서의 호랑이다. 눈을 밟는 소리까지 들릴 듯한 묘사는 단순한 사실주의가 아니라, 시간의 밀도를 화면에 심어 넣은 결과다. 색채의 선택 또한 절제되어 있다. 설경의 백색은 과도하게 번지지 않고, 호피의 선은 또렷하되 과장되지 않는다. 송죽의 녹은 차갑게 살아 있고, 바위의 회색은 계절의 무게를 고스란히 전한다. 이는 기술의 과시가
K-민화 이존영 기자 | 반차도는 행렬의 그림이지만, 실은 국가가 작동하는 방식을 그린 지도다. 김선희 작가 의 '왕조 왕세자 책례반차도권'은 화려한 의식의 기록을 넘어, 한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를 정렬하는지를 또렷이 보여준다. 이 긴 두루마리 속에서 주인공은 단 한 사람이 아니다. 깃발과 의장, 악기와 기물, 보폭을 맞춘 사람들 하나하나가 주체다. 앞서지도 뒤처지지도 않는 속도, 역할을 넘지 않는 선, 그 절제가 이 행렬의 품격을 만든다. 책례는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공동체가 합의한 질서의 확인이다. 김선희 작가는 반차도의 미덕인 ‘거리감’을 정확히 살린다. 인물들은 작게 그려지지만, 관계는 크게 보인다. 왕세자의 자리는 중앙이되 과장되지 않고, 의장물은 권위를 드러내되 폭력적이지 않다. 이 그림에서 힘은 소리치지 않는다. 정확히 제자리를 지킬 때 힘은 가장 크다는 사실을 화면이 증명한다. 색채와 배열은 반복을 통해 안정감을 만든다. 같은 옷, 같은 기물, 같은 간격의 행렬은 획일이 아니라 신뢰의 리듬이다.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만 즉위는 정당성을 얻는다. 그래서 이 반차도는 축제가 아니라, 국가의 약속문처럼 읽힌
K-민화 김학영 기자 | 민화는 늘 두 개의 시간을 산다. 하나는 오래된 기억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을 견디는 생활의 시간이다. 강경희 작가의 ‘그리운 금강산’은 그림이기 이전에 기억의 지형이다. 눈으로 보는 풍경이 아니라, 마음이 되돌아가는 자리다. 겹겹이 솟은 산세는 높이를 다투지 않는다. 이 산들은 경쟁하지 않고,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대신 마음의 깊이를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다. 봉우리마다 안개가 머무는 까닭은 아직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산허리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 안개는 흐릿함이 아니라, 보류된 고백이다. 화면 아래 낮게 놓인 집들과 굽이치는 물길은 인간의 자취를 겸손하게 둔다. 사람은 작고, 산은 크다. 이 질서는 분명하다. 자연은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며, 인간은 그 곁을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강경희의 금강산에서 산은 침묵으로 말하고, 사람은 그 침묵을 배우듯 서 있다. 금강산은 언제나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리움을 과장하지 않는다. 절제된 색채와 넉넉한 여백은 상실의 감정을 소리 내어 울리지 않고, 오히려 오래 간직하게 만든다. 이 산은 정치가 아니고, 이 산은 구호가 아니다. 돌아
K-민화 강경희 기자 | 이 k-그라피 작품의 첫 문장은 선언에 가깝다. 「청하淸河를 읽다. 」, 맑음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파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가능성은 조건이 아니라 태도이며, 세상과 관계 맺는 하나의 방식임을 글과 획으로 증명해 보인다. “사람은 맑은 사람에게 끌리고, 바람은 맑은 강물로 내려온다.” 작품 속 이 문장은 미문美文이기 이전에 삶의 법칙처럼 읽힌다. 계산과 소음이 가득한 시대일수록, 사람은 더욱 맑은 곳을 향해 이동한다. 권력이나 요란한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 흐르며 낮아지는 존재에게 마음은 끌린다. 성파의 글씨는 바로 그 ‘낮아짐의 힘’을 품고 있다. 이어서 작가는 말한다. “이익을 취함에 스스로 부끄럼 없으니 맑고 세상살이 물처럼 흐르니 이 또한 맑도다.” 여기서 ‘맑음’은 도덕적 완벽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끄러움을 아는 감각, 그리고 집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태도가 맑음을 만든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오늘의 사회를 향한 조용하지만 분명한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취하면서도 부끄럽지 않은가. 우리는 어디까지 흐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단에 병기된 한문 구절은 작품의 정신을 더욱 단단히 붙든다. 人濁爲引以淸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