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민화 이존영 기자 | 해와 달은 원래 하늘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화는 종종 그것들을 땅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앉힌다. 김정연 작가의 '일월수상도'에서 해와 달은 더 이상 먼 천체가 아니다. 나무의 꼭대기에 머물며, 생명의 시간과 호흡을 함께한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수壽의 나무’가 서 있다. 깊은 뿌리와 굳건한 몸통은 세월을 견딘 존재의 형상이고, 그 위로 펼쳐진 잎들은 축적된 생의 결과다. 해와 달은 그 위에 겹쳐지며 낮과 밤, 시작과 끝을 나무 한 몸에 포개 놓는다. 이는 장수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순환의 완성임을 말한다. 상단을 채우는 오방색 구름은 역동적이되 과하지 않다. 구름은 흐르며 바뀌지만,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 변화와 지속의 균형이 화면 전체를 지탱한다. 산은 낮고 반복되며, 물결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모든 요소가 자기 자리를 지킬 때, 세계는 소란 없이 오래 간다. 김정연 작가의 색은 선명하지만 절제되어 있다. 강렬한 원형의 해와 달은 시선을 붙잡되, 나무의 생명력을 압도하지 않는다. 이는 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는 민화의 미덕이다. 중심은 위가 아니라 관계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장수를 숫자로 계산한다. 그러나 '일월수상도'는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그 본질은 권좌가 아니라 질서의 중심이었다. 이미형 작가의 '황금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황금’이라는 선택으로 다시 세운다. 금빛은 장식이 아니라 선언이다. 흔들리는 시대에 중심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다. 검은 바탕 위에 떠오른 원형의 세계는 닫힌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집중된 우주다. 해와 달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산은 높되 과시하지 않고, 물은 흐르되 넘치지 않는다. 모든 요소는 자기 몫의 자리를 지키며 침묵의 합의를 이룬다. 이 합의가 바로 나라의 기틀이었고, 오늘의 삶에도 필요한 기준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금빛은 ‘부’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응축으로 읽힌다. 수없이 겹친 선과 결 위에 올라앉은 금은, 빠른 성취가 아닌 오래 견딘 결과의 색이다. 검은 바탕은 빛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대비가 아니라, 빛이 태어나기까지의 밤이다. 밤을 통과한 빛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화면은 말없이 증명한다. 원형 구도는 시작과 끝을 지운다. 왕의 자리는 비어 있고, 대신 자연의 순환이 자리를 채운다. 이는 권위의 공백이 아니라, 권위의 재정의다.
K-민화 이존영 기자 | '태평성시도'는 조용히 묻는다. “태평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그림에는 영웅이 없다. 대신 사람이 있다. 땀 흘리는 사람, 웃는 사람, 다투는 사람, 건너는 사람, 나르는 사람. 송정혜 작가의 '태평성시도'는 ‘이상 국가’가 아니라 ‘작동하는 사회’를 그린 그림이다. 태평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축복이 아니라, 매일의 노동과 관계가 쌓여 만들어지는 풍경임을 이 그림은 말한다. 화면은 빽빽하지만 혼란스럽지 않다. 다리는 제 역할을 하고, 물은 흐르며, 장터는 소란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이 질서의 중심에는 권력이 아니라 생활이 있다. 민화적 시선은 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같은 눈높이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것은 ‘협력의 장면들’이다. 통나무를 나르는 손, 다리 아래서 물을 가르는 몸, 장터에서 음식을 나누는 얼굴들. 태평은 정적靜的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조율되는 역동적 균형이다. 그래서 이 그림은 평화롭지만 정지돼 있지 않다. K-민화는 전통을 반복하지 않는다. 오늘의 삶을 비추는 거울로 전통을 다시 사용한다. '태평성시도'는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질문을
K-민화 이성준 기자 | 이 그림 앞에서는 누구도 서두르지 않게 된다. 노지영 작가의 '화조도'는 한 계절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고, 생명이 머무는 방식을 조용히 들려준다. 화면을 가득 채운 매화 가지와 꽃, 그리고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는 새들은 ‘움직임’보다 ‘공존’을 먼저 말한다. 화조도는 민화에서 가장 인간적인 장르다. 왕도, 신선도, 호랑이도 아닌 꽃과 새. 일상의 풍경이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연의 언어다. 그러나 노지영의 화조도는 단순한 길상吉祥의 나열이 아니다. 이 작품의 중심에는 하나의 나무가 서 있고, 그 나무를 기준으로 수많은 생명이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지며도 질서를 잃지 않는다. 나무의 줄기는 굽이치되 흔들리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처럼 패인 옹이와 뒤틀린 가지는 생의 굴곡을 닮았고, 그 위에 핀 매화는 시련 이후에 오는 단단한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꽃은 만개했지만 과시하지 않고, 새들은 날지만 소란스럽지 않다. 모두가 자기 몫의 봄을 살고 있을 뿐이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새들의 배치다. 까치, 제비, 원앙, 이름 모를 작은 새들까지 이들은 같은 방향을 보지 않는다. 어떤 새는 날고, 어떤 새는 쉬며, 어떤 새는 서로를 바
K-민화 이존영 기자 | 연꽃은 늘 물 위에 있지만, 그 뿌리는 가장 낮은 곳에 닿아 있다. 이윤희 작가의 '연화도'는 바로 그 낮음에서 시작되는 상승을 화면 전체의 리듬으로 펼쳐 보인다. 세로로 길게 뻗은 화면에는 연잎과 연꽃이 층층이 배치되고, 그 꼭대기에는 물총새 한 쌍이 날아든다. 이는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다. 삶의 단계와 마음의 이동 경로를 은유적으로 그린 하나의 서사다. 연꽃은 멈추지 않고 피어난다. 이 작품 속 연꽃은 만개와 봉오리, 그리고 막 물 위로 올라오는 순간까지를 모두 품고 있다. 피어 있음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의 한 장면일 뿐이라는 듯, 연꽃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산다. 이것이 민화가 말하는 시간의 윤리다. 앞선 꽃이 뒤의 꽃을 가리지 않고, 아래의 봉오리가 위를 시기하지 않는다. 이윤희 작가는 이 질서를 과장하지 않는다. 담담한 선과 절제된 채색으로, 연꽃이 지닌 자기 완결의 품격을 드러낼 뿐이다. 물총새, 고요를 깨우는 의지 연화도에서 물총새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정확히 목표를 향해 급강하하는 이 새는 결단과 집중의 상징이다. 연꽃 위를 스쳐 날아드는 물총새의 움직임은, 고요한 화면에 긴장을 부여하며 말한다.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공작은 부귀와 영화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현숙 작가의 '비파공작'은 이 익숙한 상징을 한 단계 낮은 음역으로 끌어내린다. 이 작품에서 공작은 화려하지만 요란하지 않고, 눈부시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다. k-민화가 지켜온 절제의 미학이 이 작품의 화면에서 또렷이 드러난다. 비파나무 아래, 공작은 기다린다. 비파는 열매를 맺기까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나무다. 꽃과 열매, 잎이 한꺼번에 존재하는 이 식물은 ‘축적된 시간’을 상징한다. 한현숙은 공작을 비파나무 곁에 둠으로써, 부귀를 단발의 행운이 아닌 인내의 결과로 다시 정의한다. 공작의 꼬리는 펼쳐지지 않았다. 대신 바위에 기대어 흐르듯 내려온다. 이는 승리를 과시하는 몸짓이 아니라, 자기 자리를 아는 존재의 태도다. 색은 많되, 소리는 낮다. 이 작품의 색채는 분명 풍부하다. 청록, 남색, 금빛, 그리고 비파 열매의 따뜻한 황색이 화면을 채운다. 그러나 그 조합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각자의 영역을 지킨다. k-민화는 언제나 이렇게 말해왔다. 아름다움은 높일수록 값지는 것이 아니라, 조화될수록 깊어진다고... 두 마리
K-민화 이존영 기자 | 일월오봉도는 왕의 뒤에 놓인 그림이었지만, 실은 왕을 위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가 지켜야 할 질서를 그린 그림이었고, 인간 위에 놓인 자연의 법칙을 시각화한 우주도였다. 정선영 작가의 ‘일월오봉도’는 이 오래된 도상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호흡하게 만든다. 화면을 가르는 짙은 밤하늘, 그 위에 떠 있는 해와 달은 낮과 밤의 대립이 아니라 공존의 약속처럼 배치된다. 어느 한쪽도 중심을 독점하지 않는다. 균형은 이미 전제되어 있다. 오봉은 산이 아니라 원칙의 형태다. 다섯 봉우리는 위계를 이루지 않으며,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파도는 멈추지 않고 흐르되 넘치지 않고, 폭포는 떨어지되 소란스럽지 않다. 이는 힘의 과시가 아니라, 질서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풍경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색의 절제다. 전통 일월오봉도의 상징색을 유지하면서도, 과도한 장식 대신 리듬과 반복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이는 왕권의 위엄을 강조하기보다, 국가와 개인을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을 드러내려는 태도에 가깝다. 오늘의 사회는 끊임없이 중심을 요구한다. 누가 중심인가,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다. 그러나 정선영의 일월오봉는 다른 질문
K-민화 이존영 기자 | 민화의 장수는 언제나 엄숙하지 않았다. 오래 산다는 뜻은 무게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을 잃지 않는 일에 가까웠다. 황현진 작가의 '해학반도도'는 그 사실을 한 장의 풍경으로 풀어낸다. 반도蟠桃의 풍요와 학의 고결함, 파도의 반복과 구름의 유영이 모든 상서가 모였는데도 화면은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미소가 먼저 온다. 복숭아나무는 바람을 타고 굽이치며, 학은 가지 위에 앉아 서로의 균형을 살핀다. 바다는 규칙적인 파문을 만들고, 구름은 그 위를 가볍게 건너간다. 여기에는 힘의 과시가 없다. 장수는 위에서 내려오는 축복이 아니라, 관계의 리듬에서 생겨난다는 민화의 지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해학’이라는 제목은 정확하다. 웃음은 대상이 아니라 태도다. 반도는 크되 위압적이지 않고, 학은 고상하되 거리 두지 않는다. 파도는 세차되 질서를 잃지 않는다. 황현진은 상서의 요소들을 서로 밀치지 않게 배치해, 장수의 조건을 ‘공존’으로 제시한다. 오래 살려면, 먼저 함께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색은 부드럽고 선은 절제되어 있다. 이는 민화가 지닌 생활의 미학에서 과잉을 경계하고 반복을 신뢰하는 태도를 현대적으로 계승한다. 작품속의 여백은
K-민화 이존영 기자 | 바다는 늘 흔들린다. 그러나 흔들림 위에 선 존재가 있다. 신지연 작가의 '해응영일도'는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된다. 파도가 부서지는 절벽 끝, 독수리는 날지 않는다. 대신 선다. 이 그림에서 비상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다. 해가 떠오르는 수평선은 희망의 은유이되, 감상적이지 않다. 붉은 태양은 응시의 대상이고, 독수리는 그 앞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민화 속 영웅은 언제나 과장된 힘을 갖지 않는다. 다만 자기 자리를 정확히 알고,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해응영일도'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독수리는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결기의 형상이다. 파도는 시련을, 바위는 책임을 뜻한다. 그 위에 선 독수리는 ‘지금’의 무게를 견디는 존재다. 이 장면에서 K-민화는 과거의 길상吉祥을 오늘의 태도로 바꿔 놓는다. 희망은 도망치지 않고, 현실 위에 선다. 신지연 작가의 작품은 절제되어 있다. 색은 낮고, 선은 분명하다. 이는 감정을 부풀리기보다 판단을 또렷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그림은 위로보다 각성을 택한다. “날아오를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서 있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K-민화는 삶의 가장 험한 자리에서도 품격을 잃지
K-민화 이존영 기자 | k-민화에서 ‘복’은 언제나 멀리 있지 않았다. 빌고, 기다리고, 애써 끌어오는 대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 스며드는 상태에 가까웠다. 김태연 작가의 '넝쿨째 굴러온 복'은 그 오래된 민화의 감각을 오늘의 언어로 환하게 되살린다. 작품 속에는 두 개의 복주머니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하나는 노란 바탕 위에 ‘복(福)’ 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고, 다른 하나는 오색의 결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두 주머니는 경쟁하지 않는다. 크기를 자랑하지도, 더 많은 것을 담으려 하지도 않는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충분하다. 주머니 안에 담긴 과일들은 풍요의 상징이지만, 과잉은 없다. 석류와 감, 포도와 복숭아는 계절처럼 배치되고, 삶의 주기를 닮아 있다. 이는 “많이 가져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잘 차려진 하루를 살라”는 조용한 권유에 가깝다. 특히 주목할 점은 화면을 감싸는 넝쿨과 연꽃이다. 넝쿨은 스스로 자라되 억지로 뻗지 않고,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소란 없이 핀다. 이 그림에서 복은 갑작스러운 행운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굴러오는 결과다. 그래서 제목의 ‘넝쿨째’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느껴진다. 오늘의 사회는 복을 숫자